전문가 못지 않는 지식이 소설작가에게 필요한 이유

소설작가는 쓰려는 무언가의 전문가가 돼야 한다. 다른 사람들도 다 아는 그런 사실을 대단한 발견처럼 떠벌리기 위해 소설을 쓸 필요는 없다. 독자가 어떤 소설을 선택했다는 것은 그가 이미 그 소설에서 그린 세계에 대해 상당한 관심과 식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봐야 한다.

독자를 감쪽같이 속여 넘기기 위해서도 쓰려는 이야기의 전문가가 돼야 한다.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이야기를 쓰라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 무엇이 남들도 다 아는 것, 뻔한 이야기, 들어봤자 그렇고 그런 것이면 독자들은 그 이야기에 식상하게 마련이다.

그 방법이 아무리 새롭다고 하더라도 남들이 다 아는 진부한 이야기는 독자를 긴장시키기 어려운 법이다. 소설 한 편을 만든다는 것은 곧 독창적인 새로운 세계 하나를 만든다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누구도 그 속에 들어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로서의 낯설음, 신비함, 의외성이 독자를 사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만든 사람만이 그 문제에 대해 정통하다는 전문성의 강조야말로 소설을 쓰는 또 다른 즐기움일 수 있다. 동학혁명을 소설로 다루는 작가는 동학혁명의 배경과 그 역사적 의의에 대해 사학자 못지 않은 오히려 그 역사 인식의 깊이와 각도에서는 사학자보다 앞서는 잣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본다.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하는 소설

지나간 역사 속의 어느 번누리 그늘진 곳을 재생시키기 위헤서는 그 시대 민중적 삶의 제반 습성과 하찮은 일상에 대해서도 정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종교문제를 다루는 소설은 작가가 얼마나 진지한 구도적 자세로 그 문제를 다루었는가에 따라 독자로부터 신뢰를 얻어낼 수 있으며, 농촌문제롤 다루기 위해서는 그 방면 정책자의 안목은 물론이고 그 정책 자체를 체감으로 비판할 수 있는 농민의식이 있어야 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성공한 소설은 어김없이 그 소설 전체, 아니면 그 어느 한 부분만이라도 반드시 독자를 제압하는 전문적인 안목이 그 작품의 형상화에 기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전문적인 안목이란 단순히 지식의 나열이나 현학적 자기 과시가 아닌 신념과 그 판단이 따르는 책임성, 진실성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전문성의 문제를 생각할 때 노동자, 농민 혹은 어느 전문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그 방면의 이야기를 소설로 형상화시키는 작업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창작주체의 문제도 제기될 수 있다고 본다. 쓰려는 그 무엇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당신은 그 무엇 속에 깊이 빠져들이야 한다. 당신이 그처럼 몰입한 그 문제가 온전히 당신의 것으로 절실하게 다가설 때 소설쓰기를 시작할 일이다.

전문가 못지 않는 지식이 소설작가에게 필요한 이유를 알아보자. 작가의 관심과 창작 욕구를 강렬하게 유발하는 작가정신의 치열성은 무엇에 대한 집착이 상상력과 맞아떨어질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절실한것을 써라. 비록 그것이 역사적인 사건을 다루는 소설일지라도 쓰는 사람쪽에서는 그 것을 쓰지 않으면 안 될 어떤 절실한 것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내면은 들여다보는 소설작가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작가가 자신의 내면에서 얼마나 절실하게 그 이야기를 필요로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자기가 가장 잘 아는 이야기를 써야 한다. 작가들의 출세작이 대부분 자기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쓴 이야기라는 것을 확인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것은 체험 그 자체가 소설이 될 수 있다는 애기가 아니고 체험적 사실이 이야기를 절실하게 만드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절실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는 그 것을 만드는 사람 자신의 체질과 개성에 맞는 것을 찾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가 좋아하는 빛깔과 소리로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성공한 작품들은 대체로 그 작가의 개성이 유감 없이 발휘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성에 맞는 이야기일 때 쓰려는 대상을 인식하는 능력과 이야기를 만드는 장인의식이 맞아 떨어지는 법이다. 남이 쓴 것을 읽어보고 나도 이런 것을 쓰면 좋겠다고 욕심을 내 달라 붙어봤자 그것을 만드는데 신명을 빌 수 없기 마련이다.

신명나는 이야기를 써야 한다

쓰는 일에 신명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이야기가 절실하지 않다는 증거다. 신명도 나지 않는 이야기를 억지로 만들어봤자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는 법이다. 우리들 주변에는 능력있는 작가들이 거의 절필 상태에 있는 것을 꽤 여럿 볼 수 있는데 그짓은 그 작가들이 신명을 넬 수 있는 이야기 거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절필 상태의 그 작가는 소설을 억지로 만들어낸다는 것이 자기 자신과 독자에 대한 기만이요 죄악이란 생각으로 시달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게 쓰고 싶은 소설을 쓰지 못하는 절필 작가의 절망을 생각할 때 할 말, 쓸 말이 있어 지금 신명을 내고 있는 작가 지망생인 당신은 작가가 되어 치열하게 달라붙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할 말, 쓸 말이 있으면 그것은 언제고 넘쳐나기 마련이다. 요즘 열린 시대를 맞아 바야흐로 쏟아져 나와 홍수를 이루고 있는 르포 형식의 글이야말로 그것이 비록 문학성은 많이 부족하다고 해도 할 말과 쓸 말이 있을 때 그 형식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좋은 예가 아닌가 싶다.

경험이 최고의 재료이다

문학적 체험의 확대와 폭넓은 독서를 통해 보다 절실한 할 말, 쏠 말을 찾아야 한다. 자기 이야기로부터 시작할 일이다. 자기 자신의 일, 자기 가족 구성원이 겪고 있는 일, 이웃에서 늘 보고 듣는 일에서 절실한 것, 쓰고 싶은 그 무엇을 찾아야 한다.

자기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라는 말은 자신의 안에 들어 있어 풀어내고 싶은 이야기를 망설임 없이 풀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맺힌 것을 풀기가 소설쓰기라고 생각해도 좋다. <날개>의 이상 작가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명수였다.

그는 자신의 천재성을 거꾸로 뒤집어 보이는 일로 자기자신을 유감 없이 풀어낼 수 있있다. 같은 시대의 작가 채만식은 자신의 이야기를 냉소적인 방범으로 푼 <레디 메이디 인생> 같은 작품을 남졌고 <따라지>의 김유정 작가도 가난과 질병의 비참함을 철저하게 회화시키는 소설쓰기로 그 고통을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분단 현실을 살고 있는 이 시대 여러 작가가 오늘의 비극적 상황과 그 아픔을 개체의 체험차원을 넘어선 민족적 한으로 인식하여 그 것을 풀어내는 일에 신명을 내고 있음을 한국문학 혹은 민족문학이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이라는 점에서 본받아 좋을 것이다.

독자의 신뢰를 얻어야 좋은 소설이다

독자의 신뢰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쓰라는 이야기나 체험적 이야기를 쓰라는 것은 그 이야기를 읽는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 이야기를 쓰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감동은 그것이 꾸며진 이야기라는 사실을 잊고 완전히 그 이야기 속에 빠져들었음을 의미한다.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었다는 것은 그것을 만든 사람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말 함이다. 작가가 그 이야기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 독자에게 신뢰를 주는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이것은 소설이 마땅히 지녀야 할 진실성의 문제와도 상관된다.

독자들은 그 이야기 속에 그것을 쓴 사람의 진심이 얼마나 작용했는가를 진단하고 싶어한다. 작가 자신도 잘 모르는 이야기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걸 명심할 일이다. 독자의 신뢰를 얻어낼 수 있는 소설은 작가 자신이 감동하는 이야기여야 한다.

어쩌면 소설가는 자기가 만드는 이야기에 감동하는 재미로 소설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기가 감동할 수 있는 이야기는 그것을 쓰는 자신이 그 이야기에 얼마나 진지하게 매달렸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진실성을 만드는 무엇을 찾아 최선을 다했을 때 독자들은 신뢰의 눈으로 그 이야기에 빠저들 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