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쓰는 여자의 소설에 대한 인터뷰

소설 쓰는 여자를 인터뷰 한적이 있다. 그 당시 여성 소설가는 소설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녀는 어릴적부터 지금까지도 변함 없이 작가가 되기를 꿈꾸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심각한 얼굴로 자신을 향해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소설의 깊이에 대한 고민은 늘 하고 있었다.

소설, 왜 쓰려고 하는가? 하고 많은 고민 중에서 어찌하여 나는 소설 쓰기를 선택했단 말인가. 대답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왜 사느냐 하는 물음만큼 다분히 추상적인 것이어서 애초부터 분명한 대답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소설을 쓰려는 당신은 반드시 물어야 한다. 왜 쓰려고 하는가. 당신은 아예 이 물음으로부터 도망칠 생각을 버리는 게 좋다. 물론 당신은 이 물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이 시대의 어느 작가가 그 따위 물음으로 소설을 쓰는 일을 시작한 일이 있느냐고 반문 할런지 모른다.

소설 쓰기에 중요한 동기는 필요 없다

실상 그런 물음을 진지하게 했기 때문에 훌륭한 작가가 되었다는 기록을 본 기억이 없다. 그러나 작가가 된 그네들이 어느날 문득 ‘나는 왜 소설을 쓰게 되었는가?’를 쏟아놓기 시작했을 때 평소 그런 물음 자체를 우습게 생각해온 당신이 몹시 당혹해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기란 그리 어럽지 않다.

우선 당신은 작가가 된 그네들이 은근히 내비치는 자신에게는 소설을 쓸 그런 싹수가 어릴 때부터 나타났다는 말에 절망하게 될 것이다. 그네들의 빼어난 기억력과 어려서 보고 겪은 그 일들에 대한 심상찮은 통찰과 그 일에 맞선 수작이 당신을 기 죽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네들의 확신에 찬 그 과장된 이야기를 다 믿을 필요는 없다. 작가가 되지 못했다면 아예 머리에 떠올리지도 않았을 그 시시껄렁한 이야기가 당신을 기죽이기 위해 대단한 의미로 치장됐을는지도 모르니까. 필요 이상 절망하지 않아도 된다는 애기다.

당신은 작가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또 다른 면에서 절망을 맛보게 될는지 모른다. 작가가 된 그네들의 내적 동기가 생각했 것보다 절실 절박한 구석이 있다는걸 확인했을 때일 것이다. 작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될 어떤 숙명의 줄 같은 것이 그네들의 이야기 속에 들어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 당신에게는 그다지 달가운 일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냥 쓰고 싶어서 쓰는게 소설이다

소설 쓰기가 꼭 그렇게 절실한 동기에서 시작돼야 한다는 게 못마땅한 것이다. 이럴 때 당신은 다시 자신을 향해 심문할 필요가 있다. 왜 쓰려고 하는가. 이미 작가인 사람들은 이 물음을 대수롭잖게 여길 수도 있다. 당신도 머지않아 작가가 될 것이고 그떼는 역시 이 물음을 우습게 여길 만큼 여유를 보일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당신은 아직 작가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물어야 한다. 나는 왜 소설을 쓰려고 하는가. 자신에게 작가가 될 수 있는 싹수가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도 남들이 갖지 못한 어떤 재능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도 또한 소설 쓰는 일이 그렇게 절실한 것이어야 하는가를 따져보기 위해서도 당신은 거듭거듭 물어 야할것이다.

소설을 왜 쓰려고 하는가? 이 물음으로부터 쉽게 빠져나가기 위해서 당신은 아무렇게나 대답할 수도 있다. 쓰고 싶어 쓰는 거지 쓰는게 뭐 별겁니까? 쓰고 싶어 쓴다. 아무렇게나 한 대답치곤 명답이 아닐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누가 강요하기 때문에 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쓰고 싶어 소설을 쓴다는 것이다. 왜 사느냐는 물음에 사는 게 좋으니까 그냥 산다는 대답과 맥락을 같이 하는 말이다.

사는 게 좋아 그냥 산다는 말 속에 생에 대한 강한 긍정이 담겨 있듯 소설에 대한 무한한 애착이 쓰고 싶어 쓴다는 말을 하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처럼 진지하게 마주앉은 자신과의 눈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쓰 고 싶어 쓴다고 시큰둥하게 말하는 과정에서 당신은 지금까지 그처럼 사랑해온 문학을 영원히 잃게 될는지도 모른다.

좀더 바싹 다가 앉아 심각한 얼굴을 보일 필요에서 당신은 쓰지 않고 사는 일이 쓰는 일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어렴풋이 터득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매우 절실한 욕구에 의해 시작한 일은 대체로 후회가 없는 법이다. 뜨듯미지근한 자세로 소설 쓰기를 욕심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을 다 버릴 수있다고 생각했을 때 비로소 소설 쓰는 일을 시작할 일이다.

꼭 절실한 마음으로 소설을 쓸 필요는 없다

그렇게 절실해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소설이 절실하게 쓰고 싶어지는데는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소설 쓰는 일에 연연하게 한단 말인가? 소설이 좋아서 소설을 쓸 뿐이라구. 그러나 소설이 무엇인가 알만큼 아는 당신은 그런 대답으로 당신과의 눈싸움에서 쉽게 물러서지는 않으리라고 믿는다.

당신은 이미 소설 독자로서 소설을 좋아하는 단계는 넘어셨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기 위해 소설을 좋아하는 당신은 다시 고문하듯 묻게 될 것이다. 왜 나는 소설을 쓰려고 하는가? 그 물음은 당신이 하려는 소설쓰기에 대한 의미 부여이며 쓰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당당한 도전이다.

왜 쓰려고 하는가? 그 반성과 고문이 제대로만 이루어진다면 당신은 뜻밖에 탄탄대로를 만날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이다. 아직까지 찾지 못했던 문학적 재능이 쉽게 발견될 수도 있을 것이며 소설을 쓰지 않으면 안될 어떤 절실함을 자신의 몸 속에서 체득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시인, 작가 지망생인 대학 2학년 학생들에게 왜 쓰는가? 하는 문제를 통해 자기에게 질문을 던지게 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이유를 말하기도 했다. 이 사회로부터 소외된 그런 사람들의 정직한 삶을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소명의식 같은 것을 느낄 때 글울 쓰고 싶어진다고 한다.

또한 가슴 답답함에 대한 내 나름의 항번의 방법이 글쓰기라고 생각했다. 중, 고등학교때 백일장에 나가 두어 번 입상한 뒤 시인이 될것을 결심했다. 시나 소설을 쓰는 일이 그 어떠한 일보다 즐겁다. 즐거우면 손바닥에서 땀이 나듯 나는 글을 쓸 생각만 해도 즐겁다.

경험에서 나오는 소설 글쓰기

그런 면에서 글 쓰는 일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의 확인 같은 것이다. 어제 밤에는 돌아가신 아버지 꿈을 꾸었다. 당신의 못다푼 한을 이 자식에게 넘겨주려 하심인가? 아버지의 한은 내 가슴 밑 바닥에 항상 울음으로 깔려 있다. 그 한에서 벗어나지 못한 내 유년의 우울과 청소년기의 증오와 분노가 글을 쓰지 않고는 못견디 게 하는 것같다.

아버지의 술주정과 어머니의 가출, 동생의 만성 빈혈과 그 지긋지긋한 가난과 군대에서 죽은 동생의 무덤 위에 얹혀 있던 국화꽃까지 생생하다. 복학 후 나는 종교 써클에 안 나가기로 결심 했다. 우선은 모든 것을 문학 속에서 찾기로 한 것이다.

그 나이에 빠질 수 있는 자학과 오기와 치기스러움이 가득차 있긴 하지만 나름대로 절실한 무엇이 그네들의 대답 속에 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지금의 그네들 의식을 지배하는 것이 다름 아닌 유년시절의 어떤 아픔이란 사실의 확인했다.

각인된 아픔이 있어야만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그런 아픔 자각 자체가 글 쓰는 일에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사실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글 쓰는 일이 정말 그 일을 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본다.

중요한 것은 그네들이 글 쓰는 어떤 계기를 찾아 그것을 절실한 것으로 몸 속에 간직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바야흐로 그네들은 그 일을 본격적으로 즐기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열등감으로부터 시작된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열등감은 나의 힘! 소설쓰기의 동기부여

그러나 소설을 쓰려는 당신에게 어떤 열등감이 작용되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자기가 남보다 못났다고 생각하는 감정은 강한 자존심을 동반하면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여러가지 징후를 드러낸다. 약한 사람이 허세부리듯 흑은 저능아가 외고집장이가 되는 것처럼 열등감을 보상 받기 위한 방법으로 당신은 지금 소설가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즉, 소설 쓰는 일이 자기를 지켜내는 일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됐기 때문에 이 길로 들어섰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열등감을 감추기 위한 보호막으로서 작가들이 택한 소설 쓰기는 정말 그네들을 구원할 수 있었던 것인가?

정말 그 길밖에 없는가? 작가들은 이 문제를 놓고 수 없이 절망해 왔다. 작가들이 그 절망 속에서 터득한 분명한 사실은 자신들의 열등감이야말로 자기 문학의 근원이요 빛이었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이제까지 벗어나고 싶은 부정적 요소로서 열등감이 어느날 문득 조개 속에 박혀 있는 진주처럼 은근한 빛깔로 그네들을 사로잡기 사작했다는 말이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열등 컴플렉스가 당신의 상상력을 부추기는 힘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당신의 컴플렉스 자체가 바로 당신이 쓰려고 하는 소설의 구심점이요 지향점이라고 생각할 일이다. 그런 인식으로 소설 쓰기를 시작했을 때 당신의 상상력은 힘찬 박동으로 피어오를 것이다.

컴플랙스의 긍정적 승화 그것이 곧 문학의 길일 수 있다는 얘기다. 작가들은 대체로 자신이 작가가 되기 전까지의 자신의 모습을 패배자의 그것으로 얘기하기를 즐긴다. 그 패배, 그 참담함을 극복하게 해준 것이 바로 글쓰기였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장치로서 그네들은 열등감을 안주삼는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