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쓸 때 주제선택 및 아우트라인 작성이 중요한 이유

소설을 쓸 때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고민은 필요하다. 이는 소설의 주제의식을 갖는 일이며 주제에 맞는 이야기를 끌고 가기 위한 핵심동력이기도 하다. 물론 작가적 재능이 별로 없어도 가능한 과정이다. 오히려 소설 쓰는 재주가 없는 사람이 더 깊은 주제의식을 가지고 분명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이른바 작품의 형상화에 별 부담을 갖지 않음으로써 한 가지 문제에 겁 없이 달려들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철학이나 어떤 문제에 대한 소신 피력에 필요한 최소한의 제재(이야기 줄거리)를 적당히 늘어놓기만 하면 소설이란 이름을 빌어 독자의 손에 들어가고 그것이 소설의 전부인양 인식되는 현상도 없지 않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의 작가적 재능을 형상화도 되지 못한 소설 만들기로 허비해서는 곤란하다. 당신의 작가적 재능이 발휘돼야 할 때가 바로 지금 단계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그 뛰어난 장인의식이 이제 바야흐로 소설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신명을 내는 시간인 것이다.

주제선정 후 아우트라인을 쓰는 이유

주제를 정하고 구상의 마쳤다면 아우트라인을 작성한다. 아우트라인은 주제의식 속에서 구상된 것을 도식화한 것을 말한다. 아우트라인의 작성은 소설을 쓰는 당신의 생각을 보다 조직적이며 체계적으로 만들어주는데 결정적 도움을 준다.

당신이 구상한 소설이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인가를 중심을 잡아 긴장감을 잃지 않은채 일관성 있게 쓰여질 수 있도록 목차를 만드는 일이 곧 아우트라인 작성인 것이다.

이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는 단계라고도 할 수 있다. 이야기를 짜는 여러 방법이나 그 유형들에 대해 이모저모 생각한 것 중에서 최선의 것을 잠정적으로 선택해 굳히는 시간인 것이다.

아우트라인 작성에 모범답안은 없다. 어떻게 하는 것이 아우트라인 작성의 좋은 방법일까? 그러나 그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신의 편리에 의해 선택한 그것이 모범답안이다. 작가에 따라 그 작품의 구상 정도에 따라 혹은 그때의 기분에 따라서도 그 방법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소설 주제선정 및 아우트라인에 대한 견해

비교적 작품활동이 활발한 중견 작가 세 사람에게 구상 단계에서 아우트라인을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던 인터뷰 기사가 떠오른다. 그들 세 사람의 대답은 각기 달랐다. 누군가는 아우트라인 작성을 번거롭게 뭣하러 하냐 답했다.

다른 누군가는 머리 속에서라도 어느 정도 구상이 됐을 때 그 내용을 기록한다고도 한다. 머리 속에서 구상은 비교적 오래 하지만 그것을 아우트라인으로 작성하는 건 불과 몇 줄 안된다고 한다. 등장인물 이름이나 이야기에 끼위 넣을 삽화 같은 것이 떠오르면 써놓는 정도란다.

또 다른 누군가는 머리 속에서 어느 정도 구상이 되기 시작하면 곧바로 아우트라인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비교적 세밀하게 부호나 수자 등의 기호를 이용해서 내가 쓸 이야기를 구체직으로 도식화하는걸 선호하는 소설작가도 있었다. 아우트라인이 어느정도 완전해야 글이 더 잘 써진다고 전했다.

앞서 세 소설작가의 말 중 어느 것이 좋고 나쁘고를 따질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소설을 쓰면서 구상을 한다는 말이 어느 정도 일리는 있지만 그것은 쓰기 전 이야기의 대체적인 스토리는 잡혔을 때의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다.

소설쓰기에 아우트라인은 중요하다

머리 속에 대체적으로 잡힌 그 가이드가 바로 아우트라인 작성과 같은 것이란 것을 그 작가는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다. 작가적 재능의 과시일 수도 있다. 설사 그 작가의 말대로 구상 단계가 없이 작품을 쏠 수 있다고 해도 당신은 그 방법을 부러워하지 않는게 좋다.

독자들 중에는 그렇게 별다른 고민이나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쓰인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독자를 깔본 그 소설을 신통치 않게 생각한다. 이처럼 무서운 독자도 많다는 걸 생각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소설작가는 집필에 들어가기 전 낙서하듯 끄적인 것 그것이 아우트라인이다. 아우트라인 작성 역시 그 구상과 마찬가지로 소설 쓰는 방범이아 니라 그것을 쓰는 과정 속에서 자기 암시적인 어떤 것을 얻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자기 암시적이기 때문에 메모된 그것을 남에게 보였을 때 그것은 요령부족이거나 매우 유치한 것으로 밖에 보여지지 않는 이다. 이따위 낙서가 소설이 되다니 만약 어느 독자가 자신이 읽은 소설의 아우트라인을 우연히 보게 된다면 그는 몹시 실망할 것이 분명하다.

소설의 아우트라인에 정답은 없다

아우트라인 작성에 모법답안이 없음은 물론 작가의 능력은 자신이 작성한 아우트라인을 얼토당토 않게 벗어나지 않는한 잘 썼다고 해도 집필 과정에서 그대로 쓰여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작성된 아우트라인에 구속을 반아 그 이상을 넘어서는 것을 검내는 작가는 작가적 재능이 없다고봐도 좋을 것이다.

소설은 논문과 달리 처음 구상된대로 쓰여지지 않을 뿐이다. 그 아우트라인은 그냥 작품이 지향하는 목표의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일 뿐 여행길의 나그네는 길을 벗어나 바다로 나가 배를 타기도 하고 때로는 기차 속에서 느닷 없이 열차 강도를 만나기도 한다.

일정에도 없던 어느 남쪽 도시에 들러 옛 애인과 만날 수도 있고 작가는 그 나그네를 목적지에 이르기도 전에 죽게 할 수도 있어야 한다. 작가는 그 작품을 다 완성해 놓은 뒤 처음 작성된 아우트라인을 찾아보고 그것이 전혀 다른 내용으로 바뀌었음을 알고 놀라게 된다.

그러나 처음의 아우트라인이 그 소설의 골격이 되어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성을 들인 아우트라인은 집필을 하는데 있어 조금 더 안정된 마음으로 이야기를 술술 풀어갈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한다.

이미 집필 전에 아우트라인을 잡았기 때문에 쓰다가 이야기가 막히는 일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작성된 그 아우트라인을 한결 넘어서는 좋은 생각들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소설 쓰는 일에 신명이 나는 것도 그렇게 자신이 만든 아우트라인을 허물고 다시 더 좋은 이야기를 생각해 내는 재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설작가가 창작노트를 숨기는 이유

어느 작가고 자신의 창작노트를 독자에게 공개하는 것을 달가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이 완성시킨 작품에 비해 아우트라인이 너무 허술하고 유치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학술 논문의 아우트라인은 대체로 논점의 주종관계 및 그 단계와 중요성에 따라 대항목 / 중항목 / 소항목 세목 등으로 도식화한 것이기 때문에 보기만 해도 그럴 듯하다.

그리나 소설의 경우는 그 아우트라인이 아무리 꼼꼼히 잘된 것이라 해도 형상화된 작품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이서 그것을 남에게 내보인다는 것은 자신의 치부를 보이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작가들은 작품이 완성된 뒤에는 그 유치한 아우트라인을 찢어버리고는 나는 그런걸 아예 하지도 않는다고 시치미를 떼는 것이다. 혹시 완성된 작품이나 자신의 작가적 위신이 그 아우트라인으로 해서 손상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렇게 유치한 생각박에 할 수 밖에 없었던가 하는 자괴심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