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쓰고 싶다면 중요한 것

소설을 쓰고 싶다면 중요한 것은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하는 것이다. 시적 상상력은 다분히 직관적이고 절대적 자유성을 필요로 하는 넉넉한 마음의 상태에서 이어지는 것인데 비하여 소설에 필요한 상상력은 대상을 의식하고 거기서 어떤 의미를 인식하려는 절박성으로 하여 보다 구체성을 띠며 현실적이다.

우리의 의식은 어떤 대상(외적 세계)에 의해 드러나며 그 의식과 대상의 연결은 작가나 독자의 상상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한다. 아울러 상상력에 의해 인식되는 과정에서 어떤 요구나 희망을 내포하게 됨으로써 존재의 지향성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바꾸어 말하면 소설을 쓰려는 당신에게는 인식되는 현실을 보다 나은 세계로 보여주고 싶은 욕구로 가득한 그런 상상이 힘차게 펼쳐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럴 때 소설을 쓰려는 당신은 다소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한다. 소설이 고작 상상에서 나온 거라니 의구심을 가질 수 있겠으나 이는 사실이다.

소설을 쓸 때 중요한건 상상력

당신의 경우 상상이란 것이 대개 공상이나 망상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시의 경우는 자유분방한 공상까지를 창조적인 상상으로 떠받들 수 있겠지만 소설에서는 그것이 구별되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공상이나 몽상의 힘으로 쓰여지는 소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독자의 상상력을 마비시켜 대상을 제대로 인식 하는 힘을 빼앗기 위한 악의가 작용 되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소설을 쓸 때는 이런 세상을 상상도 하지 못했을 거다. 독자들이 여유를 가지고 이야기의 앞으로 돌아가 이를 수도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는 짓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독자들이 미래를 예상하도록 도와주지도 않는다. 그는 오직 자신의 상상으로 독자를 사로잡고 있음을 자랑삼을 뿐이다. 이쯤에서 소설 작가라면 소설이 필요로 하는 상상력은 작가의 의식이 어떤 대상(현실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을 때만 창조적이다.

상상력은 과거의 어떤 기억(강력한 충격에 의해 각인된 것일수록 좋다)이 현실의 어떤 대상과 만나는 순간 불꽃처럼 피어오르게 마련이다. 그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의 풀리지 않는 답답함과 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불꽃이다.

그 불꽃에 의해 피어오르는 문학적 상상은 인식된 대상을 번용, 변화, 융함시키는 즐거움을 동반한다. 그것은 인식된 대상에 대한 새로운 각도의 해석과 더붙어 다른 의미, 다른 가치,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즐거움인 것이다.

소설은 허구의 세계다

소설은 창조된 세계이다. 소설이 끈 끊어진 풍선 같은 공상이나 몽상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 이상 그것은 창조된 세계다. 상상력에 의해 소설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믿는 당신은 지금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질서로서 만들어지는 세게를 우리들에게 보여줄 설계를 하느라 신명이 날 것이다.

당신이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세계는 현실에서 유추된 세계다. 그러나 당신이 독창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그 세계는 헌실에 뿌리를 둔 현실의 반용이기 때문에 진실성 혹은 사실성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현실과 꼭 닭은 세계, 현실이 잘 투영된 세계를 그려내는 것이 소설을 쓰려는 당신의 욕심이다.

지극히 옳은 생각이다. 소설은 현실의 축소판이다. 어떤 면에서 소설은 역사 기록과 많이 닮았다. 소설이 사 회를 반영하는 거울이어야 한다는 소설의 효용적 측면에서 불 때 당신의 욕심은 더욱 빛난다. 그러나 소설을 쓰려는 당신의 그러한 욕심은 본래의 뜻에서 많이 빗나가 있을 수도 있다.

‘소설은 결코 현실의 묘사가 아니다’ 당신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충실히 담는 일에 만족하는 사진사가 찍은 사진과 당신의 소설을 비교해서는 안된다. 군이 비교하자면 화가가 대상의 지배적인 인상이나 그 성질을 강조한 캐리커처 한장이 당신이 그려내려는 소설과 더 닮았다고 봐야 한다.

소설을 그대로만 보면 안된다

꾸며진 이야기로서의 소설 문학이 특수한 사실만을 중시하는 역사적 기록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개연적 진실’이라는 말로 명료히 밝힌바 있다. 어느 날 낭신은 신문기자인 친구와 함께 충청도의 어느 마을을 방문한다.

출발하기 전부터 그 친구는 아직 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그 마을을 취재하게 된 홍분을 감추지 못한다. 단 한 집도 살지 않는 그 아무개 김씨 마을은 엣날은 말할 것도 없고 근래 30여년 동안 남편이 죽은 뒤 단 한 사람의 여자도 개가를 하지 않았을 만큼 열녀들이 많이 나왔다는 것이다.

열녀가 많이 나와 나라로부터 세금까지 면제받았던 마을이란 것이 엣 문헌에 고증까지 돼 있다며 그 친구는 전통적 미풍양속의 계승이란 측면에서 그 마을을 세상에 널리 알리겠다고 한다. 그러나 당신은 소설 소재를 얻기 위해 그 마을을 방문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소설을 쓰려는 당신은 친구의 홍분과는 반대로 그 마을을 ‘정말 못돼 먹은 마을’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당신은 전통과 가문과 유교적 악습이 커다란 폭력이 되어 그 마을 여자들의 인권을 유린했다는 사실에 착안해야 한다.

당신은 분노를 감춘채 그 여자들 중 어느 한 사람이 그 폭력으로부터 도망치려 몸부림하던 일을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결코 기록에 오를 수 없였던 그러나 분명히 있을 수 있었던 그 작은 항거에 대한 생각 그것이 바로 소설을 창조의 세계로 끌어 올리는 개연적 진실인 것이다.

소설을 쓰려는 당신이 소설에 대해 꼭 알아야 할 것이 또 한가지 있다. 비록 거짓말로 꾸민 이야기지만 소설은 언어를 일차적인 재료로 한 예술이다. 작가나 독자가 소설의 일차적인 재료가 언어라는 것을 잊었을 때 올바른 소설문학은 성립될 수 없다.

소설을 쓰려는 당신이 혹시 문학의 일차적인 재료가 언어라는 사실을 가볍게 생각하고 있을는지 모른다는 노파심에시 다시 한번 강조해둔다.

소설은 언어의 예술작품이다

소설은 언어예술이다. 당신이 꾸며내려는 거짓말 이야기, 그 이야기 속에 은근슬쩍 찔러 넣으려는 당신의 생각, 인식된 대상을 보다 나은 세계로 보여주려 힘차게 펼쳐지고 있는 당신의 그 자랑할 만한 상상력이다. 문학이라는 구조론적 정의는 우선 소설이 ‘이야기 구조’라는 측면에서도 음미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당신의 귀여운 어린 조카가 당신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부탁 했을 때 당신은 피아노나 그림 도구들을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이 춘향이와 돈키호테를 만난 것이 모두 언어에 의해서 이루어 졌듯 당신은 어린 조카에게 들려줄 이야기로를 준비하기 시작할 것이다.

조카를 놀라게 할 이야기도 조카의 웃음을 유도 할 이야기도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조카의 궁금증을 가중시킬 그 뜸들이기도 당신이 구사하는 말의 높낮이와 완급의 호홉도 모두 이야기의 구조로서 당신의 언어에 의해 형상화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쓰는 언어에 의해 제대로 형상화된 이야기 그 이야기를 이루는 여러가지 구조가 유기적으로 통일성을 갓추게 한 당신의 그 장인의식이 빛어낸 그 소설을 우리는 언어예술이라고 부른다. 즉, 소설은 언어의 예술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